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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전 세계적으로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서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다.  기독교는 점점 쇠퇴해져 가는반면 하나님의 교회는 날로 번창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만도 단독 건물이 쉼없이 세워지고 있다. 

그래서 일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서 궁금해 한다.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서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직접 알아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 역사,?  기독교회사와 맥락을 같이한다. 기독 교회사가 곧 하나님의 교회 역사임을 2천 년 전 예수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다.

 

하나님의 교회 역사 

 

하나님의 교회 역사는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신 때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때에 예수께서 ....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이시더니 (마가복음 1:1~10)  

당시 이스라엘은 유대교를 믿었었다. 유대교는 그들 고유의 신앙으로 뿌리가 깊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며 구원자라고 믿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기독교는 신흥종교였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이단으로 치부하며 배척했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았다. 유대인들의 섣부른 판단으로는 예수님만 없으면 그리스도교는 자연히 몰락할 것이라고 믿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형을 하루 앞둔 날 마가의 다락방으로 열두 제자를 부르섰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새 언약의 법을 세워주셨다. 최후의 만찬을 하신 날로 알려진 "유월절" 이다.

 



유월절 다음 날, 예수님께서는 로마와 유대인들의 결탁에 의해 십자가형을 받으셨다. 유대인들은 내심 기대했을 것이다. 수장인 예수가 죽었으니 당연히 그를 따르던 무리들은 뿔뿔이 흩어질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계획은 의외의 결과를 낳았다. 예수님의 희생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던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열절으로 불타게 했고, 유럽과 아시아 각지로 흩어져 복음을 가속화하는 불씨가 됐다.

하나님의 교회의 복음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실질적인 교회가 세워진 것은 아니었다.  초대교회가 건물이라는 형태럴 갖춘 것은 AD 100년이 넘어서다. 그전에는 가정 교회(House-church) 형태로 명맥을 유지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로마의 박해 때문이었다.

 

 

로마의 박해


하나님의 교회의 복음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실질적인 교회가 세워진 것은 아니었다. 초대교회가 건물이라는 형태를 갖춘 것은 AD 100년이 넘어서다. 그전에는 가정 교회(House-church) 형태로 명맥을 유지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로마의 박해 때문이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수중에 있었다. 로마는 태양신을 섬기던 다신교 국가로, 최고의 권위가 황제였다. 로마 시민은 누구든 국가의 모든 일에 복종해야 했다. 물론 기독교인들 역시 국가에 충성했지만 한 가지, 신앙을 지키는 데 있어서는 로마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당연 기독교인들은 모라의 눈엣가시였다. 

더욱이 로마 제국은 국가 통합을 목적으로 여러 신들과 함께 황제에게도 예배하는 종교가 성행했었는데, 이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은 국가에 충성하지 못한 자들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결국 로마의 황제들은 기독교 안압정책을 펼쳐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다. 초대교회는 대체로 가정 교회를 유지하며 그들의 믿음을 지켰다. 그렇다고 교회 이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로 편지를 보내며 교회 명칭을 언급했다.

 

 

로마의 탄압을 피해 여러 가정을 전전하며 예배를 드렸던 초대 기독교, 그 이름이 바로 하나님의 교회다. 즉, 기독교의 역사가 곧? 하나님의 교회 역사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로마의 눈을 피해 믿음을 지켰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에 대한 로마의 탄압은 갈수록 거세졌다.  폭군으로 유명한 네로 황제(재위 기간)는 무고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학살해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해가 지면 등불 대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기간 284~305년) 황제 때에는 칙령을 반포해 기독교인들의 예배소를 헐고, 성경을 불태우며 기독교인들을 옥에 가두었다. 이 시기 기독교인들은 채찍질을 당한 뒤 피에 굶주린 맹수의 밥으로 던져지거나 화형을 당하고, 사지가 찢기는 등 끔찍하고 야만적으로 죽임을 당했다. 시신은 방치되었다가 불에 태워지거나 강에 던져졌다. 이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로마 제국은 정부의 위력으로 기독교를 박멸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박해를 피해 가타콤에까지 숨어 들어가 예배를 드리며 믿음을 지켰다.

 

로마의 기독교 공인


이후, 로마가 내놓은 종교정책은 ‘종교의 자유’였다. 로마는 종교적 관용책을 펼치며 타 종교에 대해 묵인했다. 하지만 이런 정책은 단지 로마의 정치성향일 뿐이었다. 통치 차원에서 로마는 타 종교에 대한 관용을 베풀었으나 언제든지 필요하면 특정 신앙을 박해하거나 탄압할 수 있었다. 그 대상이 바로 기독교였다.


갈수록 거세지는 탄압 가운데서도 기독교는 로마제국 전체로 전파됐다. 처음에는 평민이나 노예 중심으로 퍼져나갔으나 점차 상류층에서도 하나 둘 기독교를 믿는 무리가 생겨났다. 상류층의 입교는 기독교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이 무렵부터 신도들이 모이는 곳에는 교회가 세워졌다. 3세기 말 무렵에는 전체 로마 인구 중 10%가 기독교인이었다. 놀라운 발전이었다. 박해를 견딘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더없는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이와 함께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하던 갈레리우스는 311년 임종 직전 기독교를 인정하는 칙령에 서명했다. 기독교의 승리였다. 이보다 더 큰 기쁨은 다음 해에 찾아왔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했다. “모든 기독교도는 신앙의 자유가 있다” 이 짧은 문장은 기독교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비로소 기독교는 347년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이르러 국교로 인정받았다. 탄압의 세월을 보내고 찾아온 눈물 겨운 결실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역사는 기독교의 타락을 가져왔다. 다시 말해 기독교의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교리가 이교도화돼버린 것이다.

 

동아시와 교회와 로마교회의 분쟁

이 무렵 교회는 동아시아 교회와 로마교회의 분쟁으로 서서히 파벌이 생겼다. 성경대로 행해야 한다는 동아시아 교회와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묵인해도 된다는 로마교회였다. 결국 로마교회는 인본주의라는 독단적인 길을 가게 됐다. 반면 동아시아 교회들은 성경을 위주로 하는 신본주의 사상을 고수했다. 두 지역 교회의 분쟁은 AD 155년 유월절 논쟁으로 촉발됐다. 로마교회 지도자인 아니케터스와 동아시아의 서머나교회 감독인 폴리카르푸스(폴리갑)가 서로의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각자 유월절을 지키기로 했다.


당시 로마교회는 유월절을 지키지 않았다. 성력 1월 14일 유월절 저녁에 행하던 성찬식을 부활절에 같이 행했다. 이런 로마교회의 새로운 관습은 성경대로 행하던 다른 지역 교회들과 충돌을 일으켰다. 이후 197년 로마교회 감독이었던 빅터가 ‘도미닉의 규칙’이라는 법을 만들어 모든 교회에 유월절 성찬식을 부활절에 행하도록 강요했다.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 교회들은 빅터의 결정에 따랐지만 동아시아 교회들은 모두 거부했다. 동아시아 교회 중 에베소교회의 감독 폴리크라테스가 빅터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편지에서 사도 빌립, 사도 요한을 비롯한 여러 순교자들이 1월 14일을 유월절로 지켰으며 8대 감독인 자신도 전임 감독의 가르침대로 유월절을 지킨다고 강조했다.


결국 유월절은 AD 325년에 폐지됐다. 이 기간에 로마교회의 교리는 급격하게 변질됐다. AD 321년 일요일 휴업령으로 성경의 안식일을 버렸고, AD 354년 크리스마스를 유입시켰으며, AD 568년 십자가상을 도입했다.

 

종교암흑기



성경적 진리를 버리고 이교도의 길을 걷고 있던 로마교회는 다른 게르만민족들을 포교할 목적으로 우상을 세우고, 교회를 웅장하게 꾸미기 시작하며, 타 민족의 풍습을 더욱 과감히 받아들였다. 각 지역의 문화적 특색처럼 등장하는 교회 지붕, 스테인드글라스, 촛불, 성상숭배 등을 들 수 있다.


로마교회의 위상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506년에는 동로마 황제까지 정책적으로 로마교회를 지지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로마교회의 감독이 교회의 우두머리라는 칙령을 반포하는 한편 590년에는 ‘교황’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기독교의 세속화는 결국 종교적 괴물을 만들었다.


AD 538년 교황은 적대 세력이었던 아리우스파의 동고트를 정복함으로써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지게 됐다. 참 진리를 전파하던 하나님의 교회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1798년 프랑스 혁명군이 교황 피우스 6세를 발렌스로 유배시킬 때까지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온 세상은 로마 가톨릭이 지배하는 종교 암흑시대로 치달았다.


이와 함께 로마가톨릭의 부패는 갈수록 심각해졌다. 교황직의 매매와 세속적 권력, 축첩, 간음, 사치, 정적 살해 등의 비리는 특정한 때, 특정 교황에게만 해당된 것이 아니었다. 교황과 성직자들의 음란한 생활은 속담과 풍자로 민중의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다. 급기야 교황 레오 3세 때는 죄에 대한 벌을 사면해준다는 조건으로 금전이나 재물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면죄부’가 그것이다. 800년경에 판매가 시작된 면죄부는 15세기에 발행량이 급격히 늘었다.

 

 

종교개혁의 산물, 개신교


천주교가 부패의 일로를 걷고 있을 무렵, 독일의 광산 노동자 가정에 한 아들이 태어났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프로테스탄트의 사상을 만든 사람, 바로 마르틴 루터다.


루터는 어느 날 수도사인 존 테첼의 설교를 듣게 되었다.
“동전이 그릇에 떨어져 땡그랑 소리를 내는 순간 영혼은 천국으로 가게 됩니다”
루터는 테첼의 면죄부 판매에 분개했다.


로마교회의 타락을 보며 실망했던 그는 당시 대주교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믿는 자의 전 생애가 회개 과정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라며 반박문을 보내고, 교회의 문에 95개조에 달하는 서한을 내걸었다. 종교개혁의 시작이었다.


그 후 프랑스의 칼뱅, 스위스의 츠빙글리 등 다양한 종교 개혁가들이 등장했다. 천주교에 뿌리를 두고 있던 이들은 종교개혁과 아울러 천주교에 대항하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다. 이것이 오늘날의 개신교다. 천주교에서 분리되어 발생했다고는 하지만 교리적 측면에서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하나님의 교회 역사, 다시 시작되다.

 

하나님의 교회 역사는 1964년 안상홍님에 의해 다시 시작되었다.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세워주시고, 예수님을 따르던 사도들과 성도들이 몸담았던 초대교회, 즉 하나님의 교회가 안상홍님에 의해 복원된 것이다.

대중들은 천주교나 개신교가 하나님을 믿는 곳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세워주신 정통 기독교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새 언약 유월절을 세워지시며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리라" 하신 하나님의 교회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두 번째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그로 말미암아 2천 년 전 사라졌던 하나님의 교회 역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2천년 이라는 세월 동안 수많은 교회들이 생겨나고 사라졌다.  교회의 홍수 속에 예수님께서 세워주신 정통 교회를 만나고 싶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희생당하시기 전날 세워주신 새 언약 유월절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 십자가 운명 이후 AD 325년 폐지 되므로 기독교인들의 마음에서 사라졌던 유월절.  그 유월절 진리를 가지고 있는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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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꿀~~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