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죽음'을 '잠'에 비유한다. 어느 묘비명에는 '아무개가 여기에 잠들다'와 같은 글귀가 쓰여 있기도 하고, 사람의 죽음을 완곡하게 표현할 때 '영원히 잠들다'라는 뜻의 한자어 '영면'을 사용하기도 한다.
2천 년 전 예수님 역시 죽음을 잠으로 비유하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사로의 죽음을 알리실 때 그가 죽었다고 하지 않으시고 그가 '잠들었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생각하는지라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요한복음 11:11~14)
죽음을 잠으로 표현하신 이유
그렇다면 오랜 예날부터 사람의 의식 속에서 '죽음'과 '잠'이 동일한 개념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왜일까?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왜 죽은 나사로를 가리켜 잠들었다고 말씀하셨을까?
죽음과 잠은 일견 비슷한 점이 많다. 죽은 사람과 잠 든 사람. 둘 다 눈을 감고 있으며, 의식도 없다. 깨어 있을 때처럼 자유롭게 말을 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다. 그러나 단순히 눈에 보이는 모습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죽음을 잠에 비유한 것은 아니다.
죽음과 잠의 유사성은 역설적이게도 이 둘의 차이점 속에서 발견된다. 죽음과 잠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생명의 존재’여부다. 죽은 사람은 의식도 없고 말도 없다. 이는 그 사람 안에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든 사람은 동일하게 의식도 없고 말도 없지만 분명히 살아있는 사람이다.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잠에서 깨어나게 된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죽음을 잠으로 표현하신 이유는, 비록 그의 육신은 죽었지만 그가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육신이 죽은 후에도 여전히 살아 존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영혼’이다.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욥기 19:26)
욥(Job)은 자신의 가죽, 즉 육체가 죽은 이후에 그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본다고 증거했다. 비록 육체는 죽어서 썩었지만, 그의 영혼은 소멸되지 않고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죽음이란, 한 사람의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현상인 것이다(전도서 12:7).
영혼의 존재에 대해 –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두 개의 삶이 존재
죽음은 곧 잠이다. 즉 잠이 든 것과 같이 사람이 죽어도 그 영혼은 여전히 살아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잠에서 깨어난다. 그것이 곧 부활이다. 이처럼 성경에서 죽음이 잠으로 표현된 것은 사망과 부활의 중간에 생명이 여전히 지속되기 때문이다.
죽음 후에도 우리의 영혼은 존재한다. 이는 곧 우리에게 육의 삶뿐 아니라 영혼의 삶, 즉 부활 이후 천국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삶이 있음을 의미한다. 눈 앞에 보이는 3차원의 세계를 살아가기도 바쁜 우리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삶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영혼의 삶을 반드시 알아야 하는 이유는 영혼이 바로 우리의 본질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 아이 위에 몸을 세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 오고 살아난지라 (열왕기상 17:21-22)
죽었던 아이의 영혼이 그 몸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아이가 살아났다. 영혼이 없는 육체는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말을 하거나 움직일 수도, 생각을 할 수도 없다. 우리가 살고 죽는 것은 바로 ‘영혼’에 달려있는 것이다.
100년이 채 되지 않는 우리 육신의 삶과, 영원히 지속되는 영혼의 삶. 이 두 가지의 삶 중,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일까. 우리는 어떤 삶에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할까. 순간의 삶을 위해 영원을 포기하는 사람과 영원의 삶을 위해 순간을 희생하는 사람, 과연 누가 더 현명한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골든타임(Golden time), 생사의 갈림길에 선 환자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제한된 시간을 뜻한다. 교통사고와 같은 중증외상 환자의 경우 1시간, 뇌졸중 발병환자는 3시간, 심장마비의 경우는 4분에서 6분이다. 그 시간 안에 제대로 된 의료처치를 하지않으면 환자는 생명을 잃게 된다. 골든타임을 놓치면 안 되는 이유다.
2015년 3월, 부산에서 열린 베드민턴 대회에 참가했던 한 40대 남성이 사망했다. 이 남성은 경기를 대기하고 있던 저녁 7시쯤 갑자기 심장마지로 스러졌다. 안타깝게도 사고 현장에는 응급 의료진이 없었다. 심폐소생술을 하기 위해 제세동기를 찾았지만 비치되어 있지 않았다. 13분 후, 소방구급대가 도착하여 병원으로 옮겼지만 결국 남성은 목숨을 잃고 말았다. 최초 심정지가 일어나고 6분 아니에 응급처치를 못했기 때문이다. 즉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시간, 골든타임을 놓쳤던 것이다.
2017년 5월 경남에서 서울로 수학여행을 온 한 여학생은 63빌딩을 구경하던 중 화장실에서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뒤늦게 친구들이 쓰러진 학생을 발견했지만 이렇다 할 응급처치를 하지 못했다.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우물만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전문의들은 "골든타임 안에 의료처치를 했으면 환자를 정상상태로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영혼의 골든타임
육신의 생명뿐 아니라 "영혼"에도 골든타임이 존재한다. 영혼이 육체 안에 있는 약 칠십에서 팔십 년이라는 시간이 영혼을 위한 골든타임이다. 때로는 이 시간이 한없이 단출될 수도 있다. 우리는 결코 내일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편 90:10)
골든타임의 시계바날은 세상에 태어나는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시간이 10년이 될 수도, 50년이 될 수도 있다. 어느 순간에 닥칠지 모르는 운명의 골든타임이 이르기 전, 인류는 자신의 영혼을 구하기 위한 응급처치를 받아야 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글ㄹ 다시 살리리니 (요한복음 6:53~54)
인류를 살리기 위해 의원으로 오신 분, 바로 예수님이다(마가복음 2:17).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만 영혼의 생명이 지속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한정적인 육신의 생명이 아닌 영원한 생명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살과 피를 어떻게 먹고 마실 수 있을가.
제자들이 예수의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 ...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라 ... 잔을 가지사 ...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19, 26~28)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방법은 유월절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을 받기 우해서는 반드시 유월절 예식에 참여해야 한다. 유월절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응급처치인 것이다.
내 연혼의 골든타임은 지금도 흐르고 있다. 아직까지 유월절을 지키지 못했다면 응급처치가 시븍하다. 만약 그 시간을 뒤로 미룬다면 영혼의 생명을 영영 잃을 수도 있다.